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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side up




뭘 해도 될 것 같은 날이 있다. 가령 중요한 면접을 위해 맞춘 알림음에 개운하게 눈떴을 때. 짐 가방을 확인하다 둔 곳을 깜빡 잊었던 애착 팔찌를 찾았을 때. 여유롭게 나선 집 앞에서 무지개를 발견했을 때. 딱 맞춰 도착한 지하철 칸에 하나 남은 빈자리를 차지했을 때. 윤정한은 그런 날의 주인공이었고 더한 행운 또한 그의 편이었다. 이를테면 긴장을 풀기 위해 느슨하게 앉아 멍때리다, 느껴진 따스한 시선의 방향으로 완벽한 이상형이 서 있을 때 (한평생 이렇게 눈부시게 생긴 사람은 본 적 없다,고 정한은 자부했다). 눈 마주친 상대의 온화한 미소에 쑥스럽게 고개를 돌렸다가 그의 손목에 자신과 똑 닮은 팔찌를 발견했을 때. 기막힌 우연에 얼떨하게 구는 사이 낯선 이가 제 앞에 자리 잡고 또 한 번 웃어줄 때. 정한 머릿속에 상투스가 울렸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예쁜 팔찌 차고 다니시네요. 정한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순진한 눈빛과 무해함을 어필하는 어깨 으쓱임은 덤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푸른 구슬을 촘촘하게 둘러싼 비즈와 얇은 실끈으로 이루어진 레이어드 팔찌는 정한이 어릴 때부터 간직해온 행운의 액세서리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에겐 코끼리 대신 스마일과 계란꽃 비즈가 들어 있었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듯한 낯선 이의 시선은 정한의 손목에 닿았다 정한에 돌아왔다. 단정하고 적당한 기장의 고동빛 머리를 한 그의 눈에 금빛 파도가 넘실댔다.

 

"그쪽도 예쁘세요.

"..네" >예쁘세요."

"..네?'

 

순간 윤정한은 몸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주위의 모든 소음이 걷히고 명랑한 음률이 멀리서 흘러나왔다. 후덥지근하고 찝찝한 공기에 은은한 데이지 향이 실려 왔다. 정한의 정신은 내린 남자 등 뒤로 문이 닫힌 직후에야 돌아왔다. 바람처럼 사라진 남자에 순간 뭐에 쓰인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봄날에 피어오른 아지랑이, 시린 여름철 햇살을 닮은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찰나에 스친 존재로부터 그리움과 호기심을 느낄 수 있구나. 한눈에 사로잡힌 연의 잔상이 맴돌았다. 남겨진 정한은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번호 물어볼걸.

 

 

Sunny side up

글쓴이, 돝.

 

 

윤정한의 후회는 길지 않았다. 남자와의 재회는 빠르고 급작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행운은 그의 편이었다.

 

정한은 면접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우습게도 이 날 유일하게 안 풀린 일이었다). 면접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성실히 준비해간 답변은 온데간데없이 산화했다. 나란히 휘발된 제정신 탓에 자신감은 곤두박질쳤다. 고리타분하게 지원 동기와 공백기, 이직 사유 따위만 묻는 면접관 때문일까, 아까 마주친 잘생긴 남자 얼굴이 아른대서일까. 알 게 뭐야. 정한은 이름도 모르는 두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로 했다. 운수 좋은 날은 개뿔. 어색해진 뒷머리를 만지며 하염없이 거리를 거닐자니 때늦은 허기가 밀려왔다. 짧은 연락처는 아무리 둘러봐도 달가운 지인 이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콩나물국밥이나 때리고 들어가야지. 푹 쉰 한숨 뒤로 폭발음이 울려 퍼진 건 계획 밖의 일이었다.

 

“어어...?“

 

등을 거칠게 떠미는 돌풍에 맥없이 휘청였다. 뒤돌아본 그곳에 괴수(怪獸)가 있었다. 화면으로만 접하던 괴생명체와의 첫 조우에 정한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거대한 몸집과 기괴한 표피, 무자비한 몸짓에 방금 지나온 거리는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여기 있으면 안 돼. 도망쳐야 하는데… 얼어붙은 다리를 주먹으로 치던 그때,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 돌린 방향에 어린아이가 오도카니 서서 울고 있었다. 괴수의 몸이 아이를 향해 들자 마법처럼 다리에 힘이 실렸다. 쿵, 쿵. 괴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거리에서 애써 중심을 잡으며 전력 질주했다. 자신을 뒤덮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도 발이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괴물보다 한발 앞서 아이를 품에 안은 정한이 몸을 웅크리고 기적을 바라며 눈을 감은 순간,

 

"괜찮으세요? 또 보네요."

 

괴수의 팔 대신 익숙한 데이지 향이 그를 덮쳤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한은 고개를 들어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남자를 다시 마주했다. 어어… 네. 그러게요. 멍청하게 들렸지만 현재 정한으로선 최선인 대답이었다. 정한의 어깨를 감싼 크고 단단한 손은 괴수의 그늘을 벗어난 자리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정한을 내려놓기 전에 가벼이 어깨를 쥐었다 뗀 손이 따뜻했다. 작은 손길로 사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어느 틈에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 힘껏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정한의 머리가 빠르게 굴렀고 남자는 눈치챈 듯 픽 웃었다. 모르셨구나. 전 걱정할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윤정한은 그 말이 거짓 없음을 눈보다 귀로 먼저 확인했다. 무너진 아스팔트 사이로 돋아난 나무 덩쿨이 남자 등 뒤에서 괴수의 몸을 휘감았다. 위협적인 괴생물을 단단히 포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엉망이 된 거리를 수습하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더한 설명이 필요 없는 놀라운 광경에 정한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구한 남자는 초능력자였다. 국가에선 센티넬(Sentinel)이라 불리는 이는 정한 너머를 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익숙한 안내 내용을 읊었다.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덕분에 인명 피해 없이 괴수를 제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요, 전 괜찮은데…"

"무사하시다면 다행입니다. 추가 지원을 요청했으므로 상황은 곧 마무리될 겁니다."

 

"아니, 저? 잠시만요?"

"혹시 모르니 곧 도착할 담당 인력의 안내를 받아 간단한 검사 받길 권합니다. 행여나 오늘 일로 후유증이 남을 수 있으니 센터 연락처도 알려드리겠…"

"그쪽 피난다고요!!!"

"아. 그런가요."

 

아까부터 보고 안절부절못하던 정한이 빽 소리 지르고서야 남자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코를 의식했다. 괜찮습니다. 덤덤하게 답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손짓이 너무 태연해서 정한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남자가 괴수를 등진 채 몸을 살짝 숙여 피를 닦기 무섭게 거대한 괴물이 포박한 줄을 우두둑 끊고 뛰어올랐다. 빼죽한 팔로 남자를 꿰뚫거나 갈기갈기 찢을 기세로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안돼…!' 정한의 입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비집어 나온 그때였다.

 

놀랍게도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정한에게는 가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뻗은 손에서 발사된 불꽃은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남자를 덮치려던 괴물에 명중했다. 괴성을 지르며 도로 넘어간 크리쳐를 본 남자의 눈이 정한과 마주쳤다. 얼빠진 표정이 마치 마주쳐선 안 될 맹수를 마주한 피식자 같았다. 살면서 처음 써본 능력에 그 또한 비슷한 표정이었으리라. 매캐한 연기에 눈이 따갑고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이 귓가에 어지럽게 울렸다. 갑자기 발현한 능력 때문일까, 전보다 압도적으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오감에 속이 메스껍고 입안이 썼다.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한에게 뜨문뜨문 물었다.

 

“방금 그건… 능력을... 어떻게...”

”걱정은 아닌데... 신경은 쓰여서요...”

“......”

“...왜요, 처음치곤 괜찮았-”

 

이번에도 말보단 몸이 먼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장보다 무릎이 먼저 꺾였고, 자의로 이루어진 행위가 아니었다. 당혹감 서린 외침과 함께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첫인상 종쳤네. 고꾸라져 정신을 잃기 전 정한이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ㅡㅡㅡㅡㅡ

 

정한이 정신을 차린 뒤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와 사이좋게 목숨을 빚진 요원은 굳은 얼굴로 문밖을 지켰다.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한참 통화하는가 하면,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정한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창 너머로 한껏 구겨지는 고운 얼굴이 자꾸 신경 쓰였다. 윤정한 씨, 검사 중에는 집중해주세요. 아, 옙. 그제야 정한은 거울을 통해 반짝이는 눈과 한껏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했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인가 싶어 고민하던 차 센터 안내원이 그를 작은 사무실로 안내했다.


“윤정한 씨는... (서류에 코 박은 남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꽤 희귀한 케이스입니다. 그 어떤 전조 증상 없이 센티넬로 발현했고, 직접 확인하셨다시피 염화(念火) 능력을 구사하는 파이로키네시스트(Pyrokinesis)입니다. 무려 S등급으로 말이죠. 정말이지 이런 경우는…"


안내원은 잠시 말끝을 흐리곤 헛기침과 함께 설명을 이었다.


"…아무튼, 초능력이 발현된 대한민국 국민은 발견 즉시 국가 센터에 신고하여 센티넬 등록 절차를 밟습니다. 국가 안전 보장을 위해 능력을 수행하도록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시민들을 보호하며 괴생명체를 제압하는 전투에 종사합니다. 정해진 법에 따라 주어진 능력을 발휘해 국가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직업군인이자 특수 대원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입소 부적격 판단을 받으면 다른 분야에 맞게 배정될 수 있습니다. 일단 여기 서류를 작성해주시면…"


네네. 그렇군요. 역시 사람 일 알 수 없네요. 하하! 정한은 남일 마냥 초연하게 대꾸하며 서류를 채워나갔다. 그래도 기절 한 번으로 초능력 얻고 평생직장 구해… 역시 운 하면 윤정한이지. 우스운 생각을 속으로 덧붙였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두툼한 매뉴얼과 함께 고루한 설명을 한참 듣는 내내 정한의 시선은 계속 창 너머 남자를 향했다. 힐끔. 또 힐끔.


억겁으로 느껴진 시간 끝에 사무실을 탈출했을 때도 남자는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첫 만남과 달리 단정한 정복을 차려입은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 채 벽에 기대서 있었다. 왼쪽 주머니에 넣은 손목은 악세사리 없이 시퍼렇게 성난 핏줄이 드러났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고 정한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표정 풀어요. 누가 보면 죽을병 걸린 줄 알겠어요.“

“정한씨,“


정한은 그제야 자신이 여태 남자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당장 내일 입소를 위해 할 일이 산더미임에도 불구, 정한은 이 이름 모르는 남자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둘 사이 확연한 온도차로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이 일... 보기보다 쉽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요?”

“쉬는 날 없고, 일도 고되고, 위험 요소나 치르는 대가에 비해 보람 없어요."

”사는 게 그렇죠, 뭐. 대한민국 공무원이면 더하고."

"정한 씨는 신체 능력상 사회 복무로 빠지는 게 본인에게 나을 거예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저 보기보다 약골 아니에요.“

"정한 씨가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올 거예요. 아니, 분명 와요. 그러니까..."

”제가

”제가" >그러니까.."

”제가 그렇게 쓸모없어 보여요? 초장에 자격 없다고 너무 단정 지으시는 거 아니에요?“


흡사 소심한 창과 담대한 방패의 대화였다. 상처받은 척 힝힝거렸더니 남자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난색을 보였다...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요. 제가 뭐라고 정한 씨에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빠르게 사과하는 남자의 모습에 정한의 가슴이 바보같이 뛰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철없이 이 상황을 즐기는지 이 남자는 알까 싶어서였다. 정한은 관대한 척, 대인배인 척 어깨 한 번 으쓱이고 넘어가기로 했다. 괜찮으면 다음에 밥 한번 사주세요. 이름도 꼭 알려주시고요. 너스레를 떠니 그제야 남자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네, 그럴게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정한은 자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큰 손으로 조심스레 맞잡은 남자는 속삭였다. 제가 더요.


ㅡㅡㅡㅡㅡ


매사가 무료하고 불안했던 서른한살 윤정한은 그렇게 일등 공무원 ‘하니’가 됐다. 때는 초여름이었다.


이능력 쓰는 공무원이 뭔 대수라고 코드네임인가 싶었지만. 쓰라길래 두 번 생각 안 하고 바로 정했다- 정한은 한번 내키면 누가 뭐래도 뻔뻔하게 밀고 나가는 재능이 특출났다. 서류를 검토하던 담당자는 그가 휘갈긴 이름을 보고 커피를 뿜었다. "왜여? 너무 대충 지었어요?" 정한은 능글맞게 휴지를 건네며 물었고 직원은 새빨개진 얼굴로 한참을 도리질했다. 그 바람에 정한은 담당자에게 별다른 설명이나 기회 없이 코드네임을 결정했고… 반나절 지나지 않아 기겁하며 후회했다:센터 내에서 대원들은 서로를 계급 떼고 코드네임으로 부른다는 내용을 확인한 탓이었다. 여기 대한민국 아니었어? 완전 아메리칸 스타일이잖아!


그리고 홍지수 대위. 서로 목숨을 빚진 은인의 이름이었다. 코드네임은 ‘조슈아.‘ 미국에서 쓰던 영어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다. 열일곱에 센티넬로 발현 후 중령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고, 열여덟에 최연소로 시험에 합격해 활동을 시작한 범상치 않은 요원이었다. 처음에는 높으신 아버지 덕을 본 낙하산이란 모진 말이 돌았지만, 조슈아는 개의치 않고 피나는 노력으로 S급의 위상을 증명해냈다며 호평이 자자했다. 정한은 자신과 동갑인 그가 딴 길로 한번 안 새고 묵묵히 그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왜 그냥 미국으로 도망치지 않았느냐는 정한의 물음에 지수는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도 친절하게 대답했다. 한국에 어머님이 있어 지켜드려야 한다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애틋하면서 모호했다.


정한은 지수의 묘한 표정에 갑작스레 발동한 장난기를 겨우 눌렀다 (안 지 얼마 안됐음에도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그를 놀리고픈 욕심이 마구 솟아올랐다). 대신 자신과 똑같은 모양의 팔찌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아 그거… 지수는 최근에 취미 삼아 비즈를 시작해서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말하면서 쑥스러워하길래 정한은 파는 걸로 착각했다며 떵떵 칭찬했다. 예상 못한 반응에 지수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맙다고 말하며 웃는 그를 보며 정한은 직감했다: 이 사람 옆에서는 최소한 심심하지 않겠구나. 얼굴 보는 재미부터 합격이었다.


입소 첫날 하니는 조슈아를 따라 담당 가이드 승관을 소개받았다- 센티넬 담당 주치의를 센터에서는 가이드(Guide)라 부른다고 했다. 실력이 지나치게 출중했던 나머지 너무 많은 센티넬을 배정받아 이래저래 고생한다는 설명이 함께였다. 퀭한 눈으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승관은 정한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간만에 들어온 신입을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는데, 정한은 어쩐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인사하는 승관에 제 여동생과 겹쳐 보여 벌써 친근했다.


 "반갑습니다, 하니…! 함께 일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

"(" >영광입니다..!"

"(남이 부른 코드네임이 낯부끄러운 정한은 받아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영광까지야… 일도 아직 시작 안했는 걸요ㅎㅎ"

"S급은 조슈아와 디노 이후로 처음인걸요! 편하게 부가이드나 닥터 부로 불러주세요! …뿌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뿌요? 닥터도 코드네임이 있나 봐요?"

"애칭입니다!"


닥터 부…승관은 종종걸음으로 정한을 배정받은 17분대(Seventeenth Squad) 센터 생활관으로 안내했다. 다른 정한의 방은 6인실로 새파란 청년들만 쓰는 공간치곤 넓고 쾌적하다. 모두 오후 훈련에 나갔는지 텅 빈 방에 짐을 두고 편의시설을 둘러보며 정한은 승관에게 지수의 방 위치를 슬쩍 물었다.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라 실망했지만 아쉬움은 길지 않았다. 승관이 조슈아는 평소 팀 관리 차원으로 자주 방문한다고 말해줬기 때문이다. 정한은 앞으로 그를 자주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입소 첫날은 태평하게 마무리되었다.


기쁨은 잠시였다. 8주 동안 진행된 기초 군사 훈련의 난이도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하니는 조슈아의 통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그가 어느 대목에서 초면인 자신을 그리 걱정했는지 완벽하게 이해됐다. 남들보다 체력이 일찍이 줄고 늦게 충전되는 정한은 이 악물며 훈련을 겨우 따랐다. 훈련도 훈련이지만 교육 시간은 더 고역이었다. 괴수 출현과 센티넬 부대의 탄생 역사부터 크리쳐(Creature)라 불리는 적수에 관한 분석, 국가 안전 보장을 위해 숙지해야 하는 매뉴얼까지… 그래도 건망증이 심한 편이라 공부는 진작 손 놨었는데. 청천벽력이었다. 공놀이를 제외한 두뇌 훈련에 자신 없던 정한에게 이 모든 과정이 거친 정글이었다- 그런데 이제 잡아먹힐 일만 남은.


그렇다고 배움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정한에게 제일 흥미로웠던 수업은 폭주에 관한 센터의 설명이었다. 센티넬은 본인의 힘을 과사용하거나 통제 못 한다고 폭주하지 않았다. 폭주는 무너진 정신력에 의해 발동됐다. 이 때문에 모든 센티넬은 활동 개시와 동시에 실시간으로 위치와 정신 수치가 집계, 송출되는 스마트 워치를 착용했다. 정신 안정 수치가 떨어질수록 워치에 표기된 숫자는 불안정하게 치솟았다. 30퍼센트 이하가 안정권이고 50퍼센트 이상부터는 경계 단계에 진입했다. 80퍼센트를 기점으로 경보가 울리고, 폭주 발생 시 비상 명령이 내려졌다. 다른 분대 사람들이 출동해 그를 사살할 의무와 권리가 발생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거나, 열심히 싸우다 나라에 의해 죽는다니. 지나치게 허무한 결말이었다.


신체적 고통과 피로도 물론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만, 궁극적으로 센티넬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했다. 때문에 정신력 강화 훈련은 센티넬에게 가장 중요하고 혹독한 훈련이었다. 힘의 크기를 측정하는 등급이 높을수록 심신이 떠안을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았다. 그런 점에서 윤정한이 가장 평온한 얼굴로 선방하며 모두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부순 여파는 엄청났다. 체력이 부쳐 수치가 잠시 치솟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거의 모든 훈련을 익숙한 듯 평온한 얼굴로 통과했다. 부실한 겉보기나 배터리와 달리 타고난 성능이 압도적으로 특출난 하니는 확실히 별종이었다. 물론 나약한 종잇장 같은 신체 탓에 자신의 엄청난 힘을 감당 못하는 현실이 사무치게 야속했다.


점심 배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내려가는지 몰랐고, 오후가 지나면 이미 혼이 나가 있었다. 밤에는 에구구 앓는 소리와 함께 드러누웠고 요란한 기상 알림음에 눈물 젖은 얼굴을 비비며 겨우 일어섰다. 그런 정한을 누군가는 면전에 대고 비웃었고, 누군가는 뒤에서 요란하게 욕하며 건방을 떨었다. 훈련 도중 닳은 체력을 긁어모아 종종걸음으로 다닌다고 '쫑쫑이'라는 별명을 붙인 괘씸한 놈도 있었다.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벌써 찾아온 듯했지만… 사실 이건 대상이 윤정한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나온 기우였다. 정한은 보통내기가 아니었고, 하니는 기죽지 않았다. 그는 악바리 기질로 꿋꿋이 쫑쫑거리며 이겨냈다.


또한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정한은 같은 부대 대원들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수년간 같은 분대에서 부대끼며 완전한 소속감을 갖춘 이들이었음에도 불구, 정한은 팀 훈련에서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딱 맞게 합을 이뤘다. 대원들 하나하나가 전부 하니에게 우호적인 것도 컸다. 아무리 힘들어서 어쨌거나 기세 좋게 버티는 정한을 모두가 높이 샀다. 그들은 체력이 부쳐도 묵음 처리된 욕설 한 번 뱉으며 일어났고, 괴수에 관한 분석 및 전투 요령 숙지도 누구보다 치밀하고 꼼꼼했다. 이미 국내에서 제일가던 17분대는 정한의 제식 시험 합격과 더불어 더욱 견고하고 완전해졌다- 추가로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하니에 관한 악담이 조슈아 귀에 들어간 직후 모든 소문은 센터 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동갑내기 에스쿱스는 물을 다루는 능력으로 조슈아와 함께 분대를 이끄는 돌격대장 리더였다. 그 뒤로 대원들의 각양각색의 화려한 능력이 줄을 이었다- 준은 신선처럼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뤘고, 호시는 전기와 날렵한 몸놀림으로 위협적인 공격력을 선보였다. 원우는 자기력을 이용해 금속 물체를 정밀하게 조작했고, 우지의 눈과 얼음을 발생시키는 능력은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민규는 웬만한 물리적 자극에 부서지지 않는 금강불괴 몸을, 디에잇은 인간의 정신 조종이 가능한 무너지지 않는 정신을 소유했다.


닥터 부의 절친 버논은 눈빛만으로 몸에 맹독을 심고 퍼트릴 수 있어 출전할 때는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끝으로 분대 막내 디노는 음파 생성과 조작이 가능해 주파수를 이용한 내부 타격을 야기하는가 하면, 일반인을 대피시킬 때 필요한 소리도 만들어냈다. 동료들이 지칠 때는 먼저 구수한 노래 한 곡 뽑아내기도 했다. 능력도 사명감도 출중하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제일 앞서는 사람들이었다. 새삼 가족만큼 애틋하고 소중한 동료들을 얻었다고 느낀 날, 정한은 벅차오르는 심장을 달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정한이 정식으로 17분대에 합류한 가을 아침, 청명한 하늘에 눈 부신 햇살이 그를 반겼다. 처음 입어본 베이지색 정복은 빳빳한 소재와 달리 몸에 꼭 맞았으며 정겨운 탄내가 났다. 대원들은 차례대로 정한의 눈을 맞추며 축하했다. 마지막으로 온 조슈아는 축하의 의미로 눈앞에서 꽃다발을 만들어 건넸다. 꼭 쥔 종이 사이로 샛노란 프리지아와 자몽 빛 튤립, 연분홍 리시안서스가 옹기종기 피어올랐다. 그 아래에 백색 히아신스와 개망초, 안개꽃과 푸릇한 홉이 아기자기하면서 차분한 미감을 더했다. 정한은 입소 이래 제일 밝은 얼굴로 꽃다발을 받아서 들었다. 살면서 이렇게 신비하고 아름다운 선물은 처음이었다.


"…선물 감사합니다 조슈아. 이렇게 준비해주시리라곤 예상 못했는데…"

"하니가 분대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 기념 선물입니다."

"조슈아와 함께 일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영광입니다..."

"단둘이

"단둘이" >영광입니다.."

"단둘이 있을 땐 지수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래, 지수야."

"죽을래 정한아?"


살벌한 말과 달리 지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정한은 새삼 드디어 한 발짝 가까워진 둘 사이를 실감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정한이 지켜본 바로는 지수는 다정하지만 단호하고, 순순하면서도 곁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좀 가까워졌다 싶으면 뒤로 물러나는데 그렇다고 먼저 밀어내진 않았다. 이렇게 어렵지만 너무 좋아 미워하기 불가능한 사람은 조슈아가 처음이고 홍지수가 유일했다. 첫인상과 변함없이 지수의 마음에 들고 싶던 정한은, 그나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엿보고 들뜬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희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ㅡㅡㅡㅡㅡ


산 넘어 산. 윤정한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센티넬로서 처음 출동한 날, 정한은 신세계를 경험했다. S랭크 센티넬의 하루는 말 그대로 과로 지옥이었다. 괴수 출현 신고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접수됐고 소대는 그에 맞춰 동분서주했다. 괴수 제압 외에도 인명 대피, 민간인 대피와 장소 통제, 상황 정리와 피해 현장 복구까지 센티넬 손을 안 거치는 곳이 없었다. 불을 다루는 신입 대원 하니는 그나마 동료들 배려로 괴수 처치에만 집중할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온종일 하려니 짧은 체력으로 자꾸만 힘에 부쳤다. 지칠 줄 모르는 듯 앞장서서 달리던 조슈아는 자꾸만 뒤처지는 하니를 돌아보고 기다렸다. 이동 중에 틈틈이 안대를 쓰고 찔끔찔끔 기력 충전하는 그를 신기함 반, 안쓰러움 반인 눈으로 바라봤다.


첫 출전 만에 피골이 상접해서 돌아온 정한을 본 승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효과 직빵 링거를 주렁주렁 단 정한은 그를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추가로 입수했다: 하나, S랭크 센티넬은 출현종의 힘과 관계없이 늘 최전방에 서며 실전 경험만 좀 쌓이면 지휘자로서 분대를 이끈다. 둘, 극상의 효율 추구 민족 아니랄까 봐 진압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되거나 돌발 상황이 생기면 리더를 제외한 대원 전원이 차출하는 경우도 있다. 셋, 결국 S랭크 센티넬은 웬만한 곳에 빠지지 않는-좋게 말하면 만능 에이스이자 다크호스, 나쁘게 말하면-동네북이다. 대한민국에서 초능력 가지고 태어난 게 죄라면 죄구나. 정한의 힘없는 중얼거림을 차마 부정 못한 승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실을 알고 본 조슈아는 상상을 뛰어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디노 말을 빌리자면 정말 제대로 된 '미친놈'이었다).


조슈아는 기계처럼 늘 같은 표정, 같은 태도로 담담하게 맡은 일을 수행했다. 한결같이 신속하고 철저한 그 모습에 한솥밥 먹은 지 오래된 동료들도 이따금 혀를 내둘렀다. 보기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라니까요?! 하니에게 포도당 주사를 맞히던 닥터 부도 냉큼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 살면서 수치가 25퍼센트를 넘지 않는 사람 처음 봤어요. S급 센티넬 중에서 이 정도로 기복 없이 안정된 사람은 손에 꼽아요. 그 정도 위력의 힘을 쉬지 않고 쓰면 내부에 가해지는 페널티도 클 텐데, 힘든 기색을 전혀 안 내는 지수의 정신력은 세계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승관과 달리 동생들 반응은 꺼림칙했다. 가끔 보면 그 형은 인간보다 기계 같아. 조슈아가 도맡아 하는 일이 한둘이 아닌데… 가끔은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어. 뭐 그리 아쉽다고… 명호의 돌직구에 민규도 한마디 얹었다. 정한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말라 죽지 않도록 센터에 좀 더 아니꼬운 티를 내기로 다짐한 그였다.


야속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하니는 무서운 속도로 일에 적응하며 매섭게 활약했다. 화염과 대지라는 상성이 서로 방해되리란 우려가 무색하게 그와 조슈아의 능력은 합칠수록 제압과 구조 작업에 빛을 발했다. 둘의 결속에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호흡이 한몫했다. 단둘이 남겨진 후 무난하게 상황을 정리하면 하니는 조슈아 품에 안겨 칭얼거렸다. 슈아야, 오늘은 이만 철수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는 잠시 뻣뻣하게 굳었다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곤 했다. 살가운 어조로 상황 이상해지기 전에 떨어지라는 명령을 덧붙이기도 잊지 않았다. 힝. 매정한 조슈아. 투덜거리며 떨어진 정한 뒤에서 지수가 늘 올라간 입꼬리를 원위치로 되돌리려 애쓰던 사실은 지수에게만 극비였다.


하루에 열댓번씩 호출이 들어오는 센티넬도 쉬는 날이 존재했다. 크리쳐도 공휴일이 있나 싶어질 정도로 출현 소식이 아예 없을 때. 내부에서는 이런 날을 ‘로또’라고 불렀다 (그만큼 희박하다는 소리였다) 체력 훈련만 진행하면 그날은 자유였다. 정한은 그런 날 주로 지수 방을 찾아갔다. 열에 여덟은 다른 임무나 훈련 때문에 실패했지만, 운 좋게 방에 있는 날이면 항상 성공했다. 지수는 정한의 웃는 낯에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고, 지수 방만 다녀오면 정한이 완벽하게 충전되어 나오는 게 한몫했다. 준비한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쫑알거리는 정한은 어느 때보다 생기를 띄었다.


방은 소유자 내면의 거울이랬던가. 지수의 방은 평소 일 처리와 성격만큼 빈틈없이 깔끔했다. 침대는 호텔만큼 폭신했고 진열장은 지수 세월과 취향이 담뿍한 흔적들이 정갈하게 나열됐다. 향이 날아간 데이지 향수와 옆에 놓인 첫 만남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방 안은 지수가 정한을 위해 피운 캔들 덕에 은은한 코코넛 향기가 감돌았다. 좋아하는 향이라 지나가듯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 정한의 입꼬리가 냅다 치솟았다. 역시 홍지수. 아닌 척하면서 내 취향 침대에 폭삭 누운 정한을 본 지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곤 한 소리 했다.


“누가 보면 방 옮긴 줄 알겠어.”

“안 그래도 명호랑 철이가 맨날 째려보더라. 지수 그만 귀찮게 하래.“

“알면 적당히 오지?”

”네 방이 좋은 걸 어떡해~”


태평하게 받아친 정한은 손을 가만히 뻗어 숫자를 셌다. 하나, 둘, 다섯...


와. 센터 온 지 벌써 네달이 넘었네?


서랍을 뒤적이던 지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래? 벌써 그렇게 됐구나. 혼잣말하곤 다시 정리에 집중했다. 정한은 동글동글한 지수 뒤통수를 빤히 봤다. 손으로 쓰다듬는 시늉을 하고 혼자 킥킥 웃었다.


“나랑 일해보니까 어때? 제법 괜찮지?“

”그럼, 잘하지.“

“(진짜 칭찬받으리라 예상 못한 정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벅차오른 마음과 달리 부루퉁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처음 만났을 땐... 못할 뭐라 했으면서...“

“... 걱정됐어. 함께 시작했던 사람 대다수가 떠났는데, 너랑 비슷한 유형이 많았거든. 난 운이 좋은 편이어서. 왠지 모르게 말리고 싶었어. 그땐 정말 미-“

”에이 또 그런다~ 이제 괜찮아.“


예전 일로 구구절절한 사과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당황하고 미안해서 울상이 된 얼굴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정한은 자책하는 지수를 빠르게 저지했다. 대신 빙글빙글 웃으며 놀리듯 물었다. 내가 걱정됐어? 지금도 걱정되지. 전부 다. 어떤 말을 강조하려고 했든 좋을 대로 해석하겠다고 마음먹은 정한이었다). 대화가 잠시 끊긴 동안 방을 둘러보던 정한은 벽 한편에 걸린 사진에 눈이 갔다. 노을 진 배경에 대관람차와 순백의 백사장이 인상 깊었다. 바닷가를 꾸미는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 모두 환히 웃고 있었다. 지수야, 저긴 어디야? 반사적으로 돌아본 지수 시선이 액자에 고정됐다. 저기는... 내 고향이야. 6년 전인가? 그때 가서 찍어왔어. 바다 예쁘네. 그치. 추억에 잠긴 지수의 표정은 애틋함에 젖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에 용기를 얻었다. 혼자 고민하던 마음을 끄집어 보이기 좋은 기회였다.


“우리 다음 로또 때... 바다 보러 가자.”

“바다?”

“응. 둘이서.”

“... 왜?”


왜긴. 너랑 보러 가고 싶어서지. 조개구이 먹고 맨발로 걷고. 센터에서만 썩히긴 너무 아까운 청춘이잖냐. 둘이 가기 어색하면 다른 애들 다 데려가도 되고. 지수는 정한이 궁색하게 덧붙이는 말에 밴 상처를 모른 체 했다. 대신 서랍장을 열심히 닦으며 거절했다. 둘이 바다 가서 뭐 해. 우리 그럴 여유 없어.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고 지수는 뒤늦게 일에 관한 대화로 화제를 돌렸다. 정한은 성실하게 대화를 이었지만 멋쩍고 불편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또. 가까워졌다 싶으면 지수가 그은 선이 실감이 났다. 입안이 썼다. 결국 정한은 먼저 손들었다.


“나 갈게.”

“어. 너도.”


혼자 남은 지수는 침대 구석에 앉아 정한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봤다. 손으로 쓸어 정리하려다 그냥 두기로 했다.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할 때 느낀 들뜬 기대감과 쓸쓸히 방을 나서는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중얼거렸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해 심상한 하루가 기웃기웃 저물었다.


사랑이 안 풀려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사실 일은 되려 너무 잘 풀려서 문제였다. 하니는 조슈아 부재 시 지휘자 역할을 대신 수행하기까지 가능해졌다. 지수 말대로 책임감에 따르는 무게는 과중했다. 단조로워도 충분했을 일상은 다채롭게 분망하고 버거워졌다. 정한은 우는 소리를 내면서 일단 시키면 잘했다. "뭐 어쩌겠어. 힘내야지"는 분대 내 유행어가 됐다. 잘 해낸다고 다 좋을 수는 없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는 날이 많았고, 선명하던 하루하루의 기억이 나날이 흐려졌다. 기억 파편은 하나같이 오락가락하다 빠르게 휘발됐다. 의무실 가는 일이 잦아지니 승관 또한 고역이었다. 특히 최근에 건망증이 좀 심해졌다고 말하자 이 사람이 젊은 나이에 벌써 어쩌려고 이러냐며 잔소리했다. 앙칼진 꾸짖음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고스란히 전해진 진심의 보답으로 승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때때로 지수와 단둘이 나갈 일이 생기면 여전히 어색하면서도 순조롭게 협력했다.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상황이 정리되는 즉시 불필요한 사담 없이 자리를 피하는 지수 탓에 삐걱대는 둘 사이를 되돌릴 기회가 계속 유예됐다. 스트레스가 은은하게 쌓였지만 별수 없던 정한은 언짢은 감정을 다른 곳에서 풀었다. 한밤에 부대원들과 공놀이하며 애꿎은 공만 뻥뻥 까거나, 숙소 짐과 가구들에 화풀이하다 한 소리 들었다. 너무 답답해지면 의무실에 가서 승관에게 하소연하며 노닥거렸다 (둘 사이 호칭은 어느새 “야”와 “이 자식“으로 변질했다).


여지없는 감정이 연속된 가운데, 사건이 터졌다.


도심 속 한적한 공원을 배경으로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현장에는 오늘도 하니와 조슈아 둘뿐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하나, 정한이 센티넬이 된 이래 처음 접하는 유형의 괴수였다. 겉보기로 벌레란 벌레는 다 합쳐 놓은 듯 섬뜩하고 흉포한 형태였다. 사마귀를 닮은 낫 모양의 앞다리에 나방처럼 거대한 날개, 파리처럼 거대한 눈알을 보유했다.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한 표피는 뚫기 쉽지 않아 보였다. 결정적으로 둘, 벌레 공포증은 조슈아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최악의 상대라는 뜻이었다. 방에 벌레 나오면 그늘진 얼굴로 나와서 방 포기하는 사람에게 집채만 한 곤충 탈을 쓴 괴수를 잡으라고? 퍽 가능하겠다!


욕을 씹어 삼킨 하니가 급한 대로 먼저 불덩이를 만들어 괴수 방향으로 날렸다. 악수였다. 빠르게 날아오른 괴물이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조슈아한테 달려들었다. 저를 향해 날아드는 괴수를 보고 뒤늦게 몸을 틀었지만 평소보다 반응이 굼떴다. 날갯짓 한 방에 조슈아는 저만치 날아가 나동그라졌다. 다행히 떨어지기 직전에 재생한 덤불이 받쳐주어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상황 파악 마친 즉시 보낸 지원 요청에 승인 알림음이 울렸지만, 지원 부대가 도착하기까지 둘이서 괴수를 붙잡고 버텨야 했다. 멀리서 몸을 일으킨 조슈아에게 괴수가 다가가는 윤정한은 무리수를 두었다- 뒷일은 전혀 알 바 없는 부나비처럼 온몸에 불을 지폈다.


“야!! 곤충 마왕!! 이쪽이야!!"


해충의 고개가 하니를 향할 때, 조슈아는 마찬가지로 그와 시선이 맞닿았다. 조슈아 눈이 커지면서 말리려는 손이 올라왔다. 그 와중에도 지수 얼굴에 까지고 멍든 자국들이 신경 쓰인 정한은 헛웃음이 났다. 이 정도면 중증이다. 생각을 마친 정한은 빠르게 행동했다. 온 힘을 집중해서 공원 반대편으로 달리자 거대한 울림과 함께 괴수가 날아오르며 분 바람이 등 뒤를 덮쳤다. 잠시 휘청인 정한은 멈추지 않고 우거진 나무 사이로 뛰어들었다. 온몸을 감싼 불꽃에 의해 나무들이 차례대로 점화됐다. 매캐한 연기가 눈과 코를 사정없이 찔렀다. 목표 지점에 다다른 그의 뒤로 거대한 착지음이 들리고, 정한의 불구덩이 덫에 걸린 괴물은 날개를 시작으로 빠르게 불타기 시작했다. 정한은 몸을 돌려 집채만 한 괴물 얼굴에 불꽃을 집어 던졌다. 온몸에 불이 붙은 괴수는 마지막 발악으로 날아올랐고, 정한은 필사적으로 다리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대로 날아가 버리면 끝이었다. 공중에 떠오른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지수를 향해 소리쳤다.


"정한아!!"

"지금이야 조슈아!!!"


정한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괴수 몸통이 나무줄기에 갈기갈기 찢기기 전 휘두른 앞다리에 복부를 정통으로 맞았기 때문이었다. 숨을 토해낸 정한은 자신이 만든 불바다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괴물의 사체는 금방 뒤이어 인공 호수에 떨어졌다. 가까스로 처리한 괴수를 확인하기 무섭게 지수는 정한이 추락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정한이 괴수를 무력화하기 위해 뿜어낸 불길로 사방이 온통 불길이었다. 조슈아는 단숨에 무너진 잔해와 매캐한 연기 속에서 늘어진 한 인영을 찾아냈다. 황급히 다가가 뒤집어 보니 그 꼴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괴수가 들이받은 팔은 끔찍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온몸에 생채기와 화상 자국으로 가득했다. 정한의 팔목에는 간당간당한 수치를 표시한 워치와 비즈 팔찌가 달랑거렸다. 불덩이인 이마를 따라 쓸고는 뺨을 두드리며 외쳤다. 하니..? 정한아, 야, 정신 차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올라가고 정한이 힘겹게 눈을 떴다. 윤정한 바보야... 왜 또 이래... 눈을 맞춘 지수가 저도 모르게 울먹거렸다. 하지만 떠듬떠듬 되돌아온 물음은 비수가 되어 꽂혔다.


“누구...세요

"......뭐" >?"

"......뭐?"

"저... 아세요?


여긴" >어.. 뭐지.."


여긴 어디야... 왜 이렇게 더워... 지수에게 정한의 중얼거림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발밑이 꺼지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또 한 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정한이가 힘을 너무 많이 썼어, 부상도 심하고. 상태가 엉망이라, 수치가 지나치게 높아서,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래. 암만 스스로 다독여도 귓가에 터질 듯 울리는 심박수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사이 의식을 다시 잃은 정한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죽음을 닮은 그 모습에 괜히 헛구역질이 났다.


무너진 정신을 경고하듯 워치 알람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수는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비틀거리며 정한을 업은 그는 행여나 넘어지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정한아, 제발... 이러지마... 나 무서워... 무력한 애원이 매캐한 연기와 화재 소음 사이로 흩어졌다. 멀리서 달려오는 동료들과 구조대원들이 부옇게 흐려지더니 사방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암흑이었다.


ㅡㅡㅡㅡㅡ


쉴 새 없이 구르는 눈동자가 요란했다. 야, 눈 좀 가만히 냅둬. 다 들리겠어. 승관을 흘겨본 도겸이 타박했다 - 정작 도겸의 한쪽 다리도 쉴 새 없이 떨고 있었다. 이도 그럴 만한 게, 둘은 지금까지 이 정도로 화난 조슈아를 본 적 없었다. 배뚤어진 입꼬리는 힘이 실려 푹 들어갔고, 안광이 사라진 눈동자는 불꽃이 튈 기세로 희번득했다. 정한을 꿰뚫을 기세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지 않아서 망정이었다. 그에 비해 분노를 지핀 당사자 얼굴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환자복 차림에 팔 깁스를 찬 정한은 멀쩡한 왼팔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난감한 얼굴로 승관에게 SOS를 치는 그를 보니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지수형 제발... 그래도 환자한테는 살살해줘... 승관은 속으로 애타게 빌었다.


"신참도 아니고. 그렇게 무모하게 능력을 쓰면 어떡해? 폭주하려고 작정했어?'

"우리 둘 다 무사하면 됐잖아, 슈아ㅇ...“

"아까 진짜 위험했어. 알아? 여태 임무 나가서 누구 수치 그만큼 올라간 거 봤어? 심지어 기절하고 의식 돌아오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고. 조금만 늦었으면 자살행위였다니까!“

"야, 지수야."


자자 형들 이제 그만 진정하고... 초라한 도겸의 외침이 가라앉은 분위기에 파묻혔다. 지수의 분노는 평소와 달리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정한 또한 할 말이 만만찮게 쌓여 있었다. 정한에 옮겨 간 불씨는 단숨에 폭발했다.


"네가 애야? 이게 다 장난 같냐고! 이런 식이면... 출전 허용 못해. 그럴 자격 없으니까.”

"홍지수!"


적당히 해. 여기서 제일 무모한 건 너야. 정한은 기어코 폭탄을 떨어트렸다. 의무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불행히도 상황은 승관이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 따라 흘러갔다. 차마 지수 반응을 못 보겠던 그는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정한은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하얗게 질린 지수 얼굴을 보고 잠시 후회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뭐?”

"누굴 바보로 알아?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던지. 언제까지 그렇게 모른 척할래?"

“정한이 형!”

"최근에 계속 나 피했잖아. 말도 안 섞어, 모르는 척 지나쳐, 다가가면 도망치지. 싫으면 싫다, 불편하면 불편하다,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럽다 말하지. 먼저 공사 구분 없이 속 좁게 굴어놓고, 목숨 걸어 도와줬더니 이제 와서 뭐? 장난 같냐고?”


애는 너야 홍지수. 혼자 다 짊어진 척 연기하지 마. 목숨값으로 도박하지 말고. 제 입으로 뱉어놓고 뜨끔했다. 쓰린 마음이 따갑다 못해 쿡쿡 쑤셨다. 고개를 떨군 정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 상대로 밑바닥을 보인 기분은 최악이었다. 고개 숙인 정한이 자괴감의 수렁에 빠진 사이 지수는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혼이 나간 듯 표정으로 위태롭게 입술을 떨었다. 도겸이 손을 내밀었지만 거절당했다. 조슈아는 조슈아답게 끝까지 할 말을 다 했다.


“윤정한 당분간 출정 금지야.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야, 홍지수..."

“정한아. 미안."


넌 진짜 나쁜 새끼야. 지수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ㅡㅡㅡㅡㅡ


성큼성큼 내딛는 발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사흘째 의무실 독방에 격리된 윤정한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홍대위, 조슈아, 그리고 지수 생각뿐이었다- 심지어 전날 밤에는 꿈에서까지 만나 피 터지게 싸우고 뒹굴었다. 분명 시작은 억울함이었다. 처음 듣는 지수의 모진 말로 입은 상처와 실망감, 다툼 끝에 맺힌 서운함과 분노에 휩싸이기도 잠시, 걱정하는 사람 상대로 아득바득 싸웠다는 사실에 남은 후회와 미련, 며칠째 홀로 출전 중인 슈아를 향한 걱정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내기 전 그가 던진 말도 마음에 걸렸다. 착해빠진 홍지수. 뒤에 욕할 거면서 먼저 사과하는 게 어디 있어, 사람 심란하게. 정리 안 된 복잡미묘한 감정들로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정한이 아니었다. 짧은 인내심 대신 빠른 실행력 덕에 정한은 금세 지수 방에 도착했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대답이 없자 정한은 냉큼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허술하게 열린 문을 마다할 필요 없었다 (사과는 다음에 하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덤이었다) 정한은 텅 빈 방안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섰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찾았을 때보다 이상하게 삭막하고 비어 보였다. 지수가 없다는 차이점만으로 부족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무시한 정한은 차이점을 찾으려 빠르게 방 안을 둘러봤다. 각 잡히게 갠 이불, 깔끔한 진열대, 코코넛 캔들과 데이지 향수. 비즈 팔찌는 차고 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진열장을 지나 장이란 장은 다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지수를 기다려야 하나 싶던 찰나, 무언가가 정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봐선 안 될 것이라도 목격한 듯 온몸에 힘이 실려 들어갔다. 정한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다가가서 액자 속 사진을 들여다봤다. 슈아가 좋아하는 고향의 해변. 노을 진 배경에 대관람차와 순백의 백사장. 바닷가에 드문드문 보이는 웃고 있는 사람들. 바다에 꽂혀 보이지 않았던 익숙한 얼굴이 그제야 선명해졌다.


정한은 액자 속 앳된 얼굴의 정한과 눈을 맞췄다. 당최 한 기억이 없던 장발에 벙거지를 쓰고, 고개는 살짝 기울인 채 새침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카메라를 보는 눈빛을 향해 넘치는 애정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찬찬히 뜯어보니 긴 연둣빛 소매 옆에 친근한 비즈 팔찌가 눈에 띄었다. 배경 한구석에 살짝 흔들린 채로 찍혀 못 알아차리고 넘어간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정한의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됐다. 지수가 미국에서 찍어왔다던 사진 속에 자신이 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이미 알던 사이였다고? 언제부터? 지금은 왜?


"이게… 대체…"


혼잣말하는 정한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제 머릿속을 아무리 헤집어도 사진 속 장면과 비슷한 기억 조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호흡이 거칠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며 가슴 주위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그런 정한을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열리고 에스쿱스와 디에잇이 들어왔다. 한참 동안 찾아다녔는지 둘 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벙찐 얼굴로 둘을 돌아본 정한은 명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비추는 검은 눈동자는 여러 감정이 뒤엉켜 복잡다단했다. 눈치 빠른 정한의 생각은 단숨에 그의 능력이 가장 큰 의문의 열쇠가 되리라는 추측에 닿았다. 서명호. 너 나한테 알려줄 게 있지. 응. 시간 없으니까 길게 안 말할게. 정한이 형.


"지수 형 좀 살려줘."


…이미 귀에 못 박히듯 들었겠지.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고. 형은 그냥 운이 없었어. 능력의 대가가 기억이었거든. 하지만 그 누구도 형이 폭주 한 번에 센터에 온 이후 만든 기억을 통째로 잃으리라곤 예상 못 했어. 능력을 쓰는 법만 잊었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모르겠어. 어쨌든 6년 전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고, 형의 잊어버린 기억으로 능력이고 뭐고 다 끝일 줄 알았어. 그래서 지수 형 부탁으로 센터에서의 일들을 새로운 기억으로 대체했어. 때마침 내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능력을 시험 못했었거든. 형은 내 첫 실험 타깃이었고 동시에 최고의 성공이었어. 형은 하니도 조슈아도, 센티넬도, 센터도… 모두 없던 일이 되었으니까.


지수형이 형 없이 5년을 버틴 건 기적이야. 차라리 눈에 안 보이면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했겠지만, 소실된 기억에 새로운 기억을 덧입혔더니만 형의 능력이 되살아나서 센터로 돌아오는 선택지는… 상상도 못 했거든. 혼자 너무 힘들어했어. 저번 출정으로 형 다치고 싸운 후로부터 잠도 안 자고 일만 해. 여태 봐온 수치 중 제일 높고 불안정한데 고집만 미친 듯이 부려. 오늘도 혼자 나갔고, 앞으로 계속 이러려나 봐. 이러다 진짜 큰일 날까 봐 두려워. 정한이 형,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빌게. 한 번만... 도와주라.


그 순간, 센터 내 스피커에서 찢어질 듯한 경보음이 울렸다. 센티넬의 폭주를 의미하며 사살 명령이 떨어지는 [코드 그레이]였다. 명호의 낯빛이 창백해졌고 가만히 듣던 승철도 당황한 눈치였다. 단 한 명. 명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만히 내용을 곱씹던 정한만이 이 상황에서도 차분했다. 윤정한은 도리어 기뻤다. 이제라도 진실을 알았고 지수와 저를 둘러싼 모든 의문이 풀린 상황이었다. 실마리를 찾았으니 이제 해결만 하면 됐다. 고개 든 정한은 명호와 승철이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눈빛만 봐도 서로를 알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세 동료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홍지수 관련 일이라면 늘 그랬듯 머리보다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정한이 형!! 윤정한!! 꼭 지수 데려와야 해! 동료들의 외침을 뒤로 한 하니는 거침없이 달렸다. 종착지는 다시 또 바다였다.


ㅡㅡㅡㅡㅡ


조슈아는 손등으로 무감하게 코피를 닦았다. 눈앞의 바다는 온통 잿빛이었다.


시계에 붉게 뜬 수치가 심상찮았다. 80을 훌쩍 넘은 숫자는 센터에 긴급 경보가 작동했음을 짐작게 했다. 불안정한 감정은 폭주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다. 센티넬에게 감정이란 약점, 사치, 무가치한 불산물 전부 해당했다. 내 감정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짓밟고, 살리기 위해 죽여야 했다. 그래서 얻은 대가가 그리 가치가 있었냐 묻는다면? 지수는 제대로 답할 자신이 없었다. 바싹 마른 나무줄기들과 가시넝쿨로 온몸이 꿰뚫려 녹아내리는 괴수에 자기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약하고 볼품없는 괴물의 최후. 시야가 다시 부예졌다. 땀과 눈물, 괴물의 비릿한 피비린내 사이로 옅은 코코넛 향이 새 나왔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생생했다.


지수는 얌전히 전투화를 벗어 바다를 마주 보도록 세웠다. 손에 찬 시계는 위치 추적이 되니 거칠게 뜯어 신발 옆에 뒀다. 맨발을 질질 끌며 걷자 반짝이는 모래알 위로 불규칙한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지친 몸이 맥없이 바닥에 꺾였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정한과 함께 걷던 백사장. 산타모니카 해변에 묻어 둔 고백. 맞잡은 손. 동료. 나눠 낀 비즈 팔찌. 피비린내. 성탄절에 서로 선물한 코코넛과 데이지 향수. 연인. 노을 진 하늘. 폭주. 망각의 겨울. 상실. 또 기다림. 남겨진 사진 앨범. 낯선 이, 기념일. 재회. 겁쟁이. 거짓말과 회피…. 서로에 관한 기억을 전부 잊은 그에게 끝까지 솔직하지 못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비즈 팔찌를 꺼내 양손으로 포개 쥐었다.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작은 심호흡과 함께 천천히 잔가지들을 맨 모래에서 피워냈다. 입 안에 울컥 피가 고였다. 더 늦기 전에 빠르게 끝내야 했다. 그의 주위로 이끼와 억센 줄기들이 원의 형태로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두 눈을 꼭 감고 천천히 죽음을 기다리던 그때,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렸다. 지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짭짤하고 비릿했다.


"지수야!! 홍지수!!!"


폭주마저 참 본인처럼 한다. 웃음기 싹 가신 얼굴로 우스운 생각을 했다. 이렇게 얌전하게 혼자 무덤 만들 일 있냐고. 한참 펼쳐진 모래사장을 달린 정한은 다급하게 지수를 가둔 벽에 손을 가져갔다. 깁스를 찬 팔로 엉거주춤하게 벽에 기대고 손끝에만 집중해서 불꽃을 일으켰다. 따가운 모래바람이 눈과 얼굴을 끊임없이 덮쳤고, 축축한 바다 공기에 점화 또한 쉽지 않았다. 얽히고설킨 식생 또한 힘의 주인을 따라 억세고 끈질겼다. 홍지수!! 나와서 나랑 얘기 좀 해!! 초조함에 바락바락 외치는 정한에 비해 지수의 목소리는 울음기와 장벽에 의해 볼품없고 희미하게 들렸다. 놔둬 정한아… 이미 늦었어. 욱한 정한이 되받아쳤다. 뭔 헛소리야 홍지수. 이제 시작인데. 나 너 포기 안 해. 어떻게든 꺼낼 거야.


정한은 차분하게 속으로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되뇌었다. 둘밖에 없는 이곳에서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야 했다. 불이 안 통하면 다음 시도는 무력이었다. 미친 기세로 가시덤불을 긁고 휘어잡고 마구잡이로 뜯었다. 얇은 피부는 금세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수야, 들려? 나 여기 있어! 이러지 말고 거기서 나와!"

"제발… 그만해… 얼른 돌아가..

"어떻게" >돌아가.."

"어떻게 그래, 나 너 포기 안 해. 하는 방법도 몰라."


지수를 감싼 원형 덩굴 벽은 크기를 줄이며 점차 조여들었다. 가시 돋친 억센 줄기들이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애원하던 목소리가 잠시 그치더니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담담한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웃기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있지, 정한아."

"응."

“다시는 널 못 봐도 괜찮을 줄 알았어…“

"…"

”영영 예전처럼 못 돌아가도... 네가 날 멀쩡히 잊고 잘 살더라도… 너만 안전하다면… 내가 네 몫까지 우리를 기억하면...“


옆에 없어도... 네가 있는 세상을 지키기엔 충분하리라 믿고 싶었나 봐… 애달픈 문장 한 줄 한 줄이 가슴을 옥죄었다. 묵은 고백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차오르는 눈물을 벅벅 닦던 그때, 정한 눈에 점차 얇아지기 시작한 벽이 눈에 들어왔다. 희망이 보였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정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생각은 안 했어...?”

“했지... 너무 많이..”


널 그렇게 보낸 게 잘한 일인지... 어떤 기억도 없이 살아본 적 없는 일상으로 내몰았는데 괜찮은지... 내 마음 편해지자고 널 낯선 세계로 내던지고 나 몰라라 하진 않았는지… 널 위한다고 한 행동이 다 잘못 같았어. 다 나 때문에… 네가 다시 여기 있는 게 다 내 탓 같아… 그래서…


긴 시간 홀로 삼켜 곪을 대로 곪은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지독하게 아린 마음의 결정들이 포말처럼 정한을 휩쓸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애정에 휘청이기도 잠시, 중심을 잡은 정한은 집중해서 양손에 기를 모았다 (갑갑한 팔 깁스는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정한의 손끝에서 작은 불꽃이 한 번, 두 번 터지더니 비로소 벽에 작은 불씨를 붙이는 데 성공했다. 반짝 움직이는 불꽃이 서서히 퍼져나가면서 꿈쩍 않던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야 지수야. 내가… (목이 메었다)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다 잊고 나타나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일부러 잊은 기억은 아니지만… 네가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놔둔 만큼 평생을 옆에서 속죄하고 책임지면서 살게. 지수야 나는… 널 떠나고 싶지 않아. 나이 든 네 모습도 보고 싶고, 죽을 때도 함께 있으면 다 괜찮겠다 싶어. 살고 싶어, 너랑 같이."

"…거짓말."

"나 알잖아. 빈말 못하는 거."

"정말… 안 떠날 거야?"

"응."


정한의 답은 신호탄이 되었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부터 커다란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새로 보이는 지수 얼굴이 피범벅이라 가슴이 철렁하기도 잠시, 정한은 왼팔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온갖 가루를 휘날리며 허물어진 벽이 바닷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지수야… 힘을 다한 정한의 무릎이 꺾였고 엉거주춤 일어나던 지수는 반사적으로 그를 받쳐 안았다. 중심이 무너진 탓에 둘은 모래사장에 뒤엉킨 채 굴렀다. 모래알이 머리칼과 입안에 섞여들었고, 그제야 요란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둘은 가쁜 숨을 내쉬며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멀쩡한 팔로 지수를 바짝 끌어안은 정한이 코를 훌쩍였다.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할 말 사이로 꼭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이상하지.


"명호한테 다 듣고 왔거든. 원래부터 네 동료였고, 폭주에 기억 잃고 조작된 채 나와놓고, 다시 돌아왔다는 거. 이게 다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다 알려줬는데도 신기하게 이 모든 사건의 나열이 전혀 와닿지 않아. 뒤받쳐주는 기억이 없으니까 현실감이 안 생기더라고. 네가 말하는 윤정한이 꼭 다른 사람 같고, 영화 속 등장인물이라던가 남 일처럼 다가오고."


그래도 있지… 결국 이렇게 된 걸 보면... 한 가지는 확실해졌어. 내 세상 중심은 너야. 우리에 관한 기억을 전부 잊고도, 다시 만난 그날 한눈에 반해서 너랑 같이 있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결국 네 곁으로 돌아갈 운명이었던 거야. 너와 함께 있기 위해 내가 숨 쉬고 사는 셈이지. 그러니까 홍지수, 앞으로 나랑 쭉 같이 있자. 내 앞에서 원하는 대로 마음껏 걷고 뛰고 울고 웃으면서 살아주라.


대신 너무 빨리 달리지 마. 따라잡기 힘들다. 평소처럼 늘어놓은 유치한 푸념에 지수가 맹맹한 호흡 사이로 웃음을 터트렸다. 턱 밑에 비비적거리는 머릿결이 간지러웠다. 품에 갇힌 지수는 목을 가다듬고 정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와중에도 정한의 다친 팔에 힘을 싣지 않으려 몸을 바지런히 꼬물거리는 모습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너 없이 너도 사람들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으니까. 정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이 이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혼자 그러지 마. 내가 있으니까."


나 하니잖아. 당당하게 덧붙인 정한의 말에 지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바닷바람과 땀에 젖은 산발 머리에 한참을 지저분한 몰골로도 전혀 굴욕 없는 미모였다. 지수를 비추는 눈이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눈빛만으로 사랑을 말하는 그에게서 탄내 섞인 코코넛 향이 짙게 배어났다. 둘의 손목에는 잊힌 시간을 초월한 사랑의 증거가 잘그락거렸다. 울음이 다시 터져 나올까 지수는 고개를 앞으로 기울여 그리웠던 입술 위로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잔잔한 파도 소리는 재회한 연인의 미련과 불안을 덮어주었다. 노을빛에 물든 바다 표면이 반짝이며 하나가 된 연인을 얼싸안았다. 후회는 짧았다. 행운은 쭉 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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